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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비의 편지

이육사 선생

"대를 이어 피어나는 매화 향기처럼"

이육사 선생

독립운동 활동 기록

01. 첫 옥살이

장진홍 의거 연루와 고초

1927년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후 활동 방향을 모색하던 중,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탄 사건인 '장진홍 의거'가 발생했습니다. 일경은 단서를 잡지 못하자 대구의 활동가들을 무차별 검거했고, 이 과정에서 육사 선생을 비롯한 원기·원일·원조 4형제가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훗날 장진홍 의사가 체포되며 직접적 연루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1년 반이 넘는 억울한 미결수 수감 생활을 겪어야 했습니다.

02. 대구격문사건

전국적 항일 투쟁의 연대

1929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대구 지역에서도 동맹휴학 등 거센 동조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30년 11월 대구 시내 전봇대와 거리에 일본을 배척하는 내용의 격문이 대대적으로 살포되는 거사가 일어났고, 육사 선생은 이른바 '대구격문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된 후 대구경찰서에서 2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03. 무장투쟁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

1931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김두봉, 루쉰 등과 교류한 선생은 의열단이 운영하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습니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 군사학, 폭탄 제조 및 투척법, 피신법, 철로폭파법 등 강도 높은 비밀 군사 훈련을 이수했습니다. 졸업식 날에는 직접 쓴 대본 <지하실>을 공연하고 출연하기도 했으며, 이후 국내 지부 조직과 혁명의식 고취의 사명을 부여받고 국내로 잠입했습니다.

04. 일제의 감시

요주의 인물 수배와 체포

중국에서 군사 간부로 육성된 후 국내 공작원 사명을 수행하려던 선생은, 만주 이동 이후 행방을 쫓던 일경에 의해 1934년 3월 체포되었습니다. 광화문 경기도경찰부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은 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으며, 비록 기소유예로 풀려났으나 일제의 집중적인 요주의 감시 인물로 등록되어 끊임없는 억압을 받았습니다.

🔍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요시찰 기록 원문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05. 마지막 길과 순국

1940년대 들어 국내 독립군 조직과의 연대를 위해 베이징으로부터 무기 반입 계획을 세우던 중, 1943년 7월 모친과 형의 소상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늦가을 동대문 형사대에 체포되었습니다. 20여 일의 구금 후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마지막 순간, 선생은 어린 딸 옥비의 볼에 얼굴을 대고 손을 꼭 쥐며 "아빠 갔다 오마"라는 심각하고도 애틋한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선생은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의 차가운 지하에서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셨습니다. 같은 독립운동가이자 친척인 이병희 여사가 감옥으로 찾아가 관을 인수하고 화장을 치렀으며,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어 현재 고향 마을 뒷산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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